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알렉세이 페트로비치 황태자 (문단 편집) === 최후 === 그러던 중 1716년 표트르는 대북방전쟁과 관련해 서유럽의 협조를 얻어보려고 다시 유럽으로 여행을 떠났다. 그는 [[네덜란드 공화국]], [[프랑스 왕국]], [[신성 로마 제국]]의 영방 국가 등을 방문했다. 그러던 와중인 1716년 8월 26일 알렉세이 황태자는 멘시코프 등에게서 돈을 좀 빌린 후 예프로시니아 및 소수 인원들만 데리고 러시아를 탈출, 폴란드 귀족 코한스키를 칭하며 [[합스부르크 제국]]의 수도 [[빈(오스트리아)|빈]]으로 도망쳤다. 그러다 곧 그는 빈에서 [[나폴리]]의 성 엘모 성으로 거처를 옮겼다. 그리고는 거기서 샤를로테의 언니[*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의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. 따지고 보면 [[표트르 2세]]와 [[마리아 테레지아]]는 이종사촌인 셈이다.]와 결혼한 자신의 동서 [[신성 로마 제국 황제]]이자 [[합스부르크 가문]]의 수장 [[카를 6세]]의 보호를 받았다. 카를 6세는 표트르가 알렉세이를 암살할 가능성이 있다고 여겼고 하노버 선제후이자 [[영국 국왕]] [[조지 1세]]에게 지원을 요청하기까지 한다. 일이 이상하게 진행되자 표트르는 자신의 측근인 표트르 톨스토이 백작[* 소설가 [[레프 톨스토이]]의 현조할아버지.]을 보내 알렉세이를 고국으로 돌아오게 설득하라고 지시했다. 톨스토이 백작은 알렉세이를 설득했고, 결국 알렉세이를 처벌하지 않고 예프로시니아와 결혼하는 것을 허락한다는 전제하에서 귀국했다. 다만 예프로시니아는 당시 [[임신]]한 데다가 같이 온 남자 형제가 앓아누워 빈에서 대기하기로 했다. 하지만 1718년 1월 알렉세이가 돌아오고 나서 약속은 전혀 지켜지지 않았다. 알렉세이는 구금되었고, [[반역죄|반역혐의]]로 체포되었다. [[공범|알렉세이의 도주를 도운 사람들이나]] [[반역자|표트르에 대한 반역을 도모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들]]이 고문당하기 시작했다. 그 와중에 어머니 예브도키야의 정부까지 체포되어 사형당했다. 고문은 평등하게 적용되어 '''알렉세이도 예외없이 고문당했다.''' 거기다 4월경 예프로시니아가 귀국하자 그녀 역시 구금되었다. 당시 그녀는 알렉세이의 아들로 추정되는 아이와 함께 왔는데 그 아이는 강제로 어머니 품에서 떨어지게 된 후 기록에서 사라졌다. 예프로시니아는 그 뒤 반강제로 고문도구들을 보게 됐는데 그것들을 보자마자 겁에 질려 알렉세이가 아버지가 한 모든 것들을 원상복귀시키려 했고, '''반역을 도모하려고 했다고 자백했다.''' 한편 알렉세이는 이 말을 듣고 자포자기 한 건지, 아니면 계속된 고문을 버티지 못한 건지 결국 자신이 반란 음모 등을 꾸몄다고 자백했다. 원로원은 그 말을 듣고 알렉세이에게 6월 경 사형을 선고했고 표트르의 최종 서명만이 남게 되었다. 그러던 와중에 안 그래도 고문으로 약해져 있던 알렉세이는 19일에 25대의 채찍질을 당했고, 5일 후 15대를 더 맞았다. 이런 계속된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쇠약해진 것인지, 혹은 고문 와중에 사망한 것인지는 몰라도 알렉세이 황태자는 6월 26일 사망했다. 유해는 [[페트로파블롭스크 성당]]에 안장되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